낙서장/일기

조정 대회 입상과 행복에 대한 고찰

catengineering 2025. 5. 15. 01:51

 오늘 학교 체육관에서 조정 대회 본선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냥 별 생각 없이 지나쳤겠지만, 헬스도 해서 근력도 있겠다, 요즘 러닝도 실력이 붙어서 심폐력도 많이 늘었겠다, 내 수준도 한 번 테스트 해 볼 겸 지원했다. 남자는 한 30명 정도 지원한 것 같고 화요일에 예선을 치뤘는데, 본선 8명 TO 안에 합격했다. 그리고 오늘 대망의 본선이 있었다. 대망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이 대회를 위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요즘 너무 바빠서 잠도 전날 거의 오전 8시가 다 되어서 잤고, 1시 쯤 겨우겨우 일어나서 수업에 갔다. 왜냐하면 오늘은 듣는 강의 하나에서 내가 발표하는 날이기 때문... 발표는 이틀 동안 열심히 준비했고 잘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겨우 몸 풀고 대회를 시작했다. 내게 허락된 건 몬스터 한 캔의 부스팅 정도...

 결과는 2km 7분 40초 정도였다. 하는 도중에 목에서 피 맛이 올라와서 너무나 그만하고 싶었지만 열심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나고 나서 숨이 너무 차서 옆에 쓰러져 있었는데, 3위가 돼서 기분이 좋았다ㅋㅋ 근력도 유산소도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다. 그간 운동을 한 적은 많지만 나 혼자 경쟁하거나 기록을 위한 노력만을 해보았지, 대회에서 타인과의 경쟁은 거의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4년 간의 노력의 조금이나마 수고했다고 느껴지는 그런 대회였다. 

 

 앞서 말했 듯이 오늘은 발표를 진행했다. 주제는 spin liquid였다. 내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잘 된 것 같다. 발표가 끝나고 나서 한 분한테 메일이 와서 발표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고 공유 받을 수 있는지 여쭈었는데, 당연히 보내드렸다. 다들 모르는 거 공부해서 시작한 거지만 타과생 출신에서 그래도 이제 많이 올라와서 궤도에 안착한 것 같다. 

 

 이렇게 바쁘게 살지만 요즘 너무 행복한 것 같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인생을 통틀어 행복했던 시기를 꼽으라고 하면 어디를 꼽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학생 시절에는 그다지 행복하다? 그런 감정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끽해봤자 재미있다 정도? 대학교 1-2학년 시절을 생각하니, 그때 정말 재밌게 살기는 했다. 다만 행복의 양은 많았는데 행복의 질은 사회 초년생이다 보니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무리에 속함과 술의 취기에서 오는 그런 행복이었다. 뭐 그래도 이런 때 아니면 이런 생활을 언제 해 보겠는가ㅋㅋ

 대학교 3-4학년 시절은 회사 생활과 학교 생활의 반복으로 피폐한 삶을 살았었다. 그래도 처음 실험 연구를 시작해 보면서 일부 시제품도 만드는데 성공하고 과학자로써의 첫 발걸음을 뗀 기분이었다. 행복했냐고 한다면 음... 잘 모르겠다. 그냥 즐겁게 살았다 정도인 것 같다. 

 대학교 5-6학년 시절은 이때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었다. 회사 생활 하면서 배움과 지식에 정말 목말라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무책임 하게 원없이 배울 수 있는 그런 지식의 풍요로움이 있었다. 이미 쌓아 놓은 인간 관계로 덕분에 내가 원할 때 얼마든지 재밌게 놀 수도 있었다. 이때 수학과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지식이 쌓여나가면서 내 수준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수학 성적은 낮게 나오기도 했었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너무 행복하게 지냈었다. 초중고 시절, 내가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할아버지한테 이따끔씩 가서 공부가 정말 재밌다 라고 말하던 내가 생각이 났다. 이때는 정말 순수하게 공부가 재미있었다.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고양감과 낭만스러움을 가슴 가득히 안고 살았었다. 

 

대학원 입학 전 블로그에 포스팅 했던 캡처본. 이때도 나는 내가 험한 길을 겪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내가 호랑이 굴에 스스로 기어 들어갔다. 다만, 호랑이를 만나 본 적이 없기에 지금 돌아보면 너무 간과했었다. 경솔했었다.

 이렇게 마루가 높았던 탓인지,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1년 동안 골도 깊었다. 물리는 내가 알던 것과 너무 달랐으며, 내가 어렵사리 배운 수학은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론 연구실이다 보니 내 주변에는 SKP 물리과 수석/차석 같은 괴물들이 가득했고, 이 사람들은 평생을 했다. 나는 고작 이제 2년 했을 뿐인데.. 교수님이 시키는 건 많았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감도 높은데 내 실력은 현실은 저 보이지도 않는 밑바닥에 있었다. 심지어 물리가 재미도 없었다. 나는 물리가 재미있어서 시작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그냥 버텼다.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버텼다. 

 사실 타과생 출신으로써 힘들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너무 과하게 힘들었다. 내가 겪은 적 없는 수준의 고통이, 내가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의 3배는 가뿐히 뛰어 넘는 그런 고통이 몰려왔다. 버티기 힘들었는데, 그냥 버텼다. 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건 헬스였다. 너무너무 힘들 때 그냥 가서 현실의 무게 대신 바벨의 무게에 짓눌리고 다시 들어내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지금은 너무 좋다. 물리는 너무까지는 아니지만 재미있어졌다. 연구를 하기 위한 기반이 조금씩 다져지면서 논문 하나도 읽기 힘들었었는데, 이제는 논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뭔지 내가 지금 어떤 physics를 알고 싶은 건지, 지금까지의 실험 혹은 이론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지, 이런 일련의 사고과정들이 너무나 즐겁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수학도 너무나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B-인가 C+을 받았던 들을 때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군표현론를 이제는 무기로 삼아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이해하고 싶었던 Lie structure가 group과 manifold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라는 걸 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의 고양감이 너무나 좋았다. 미분기하학을 수강하고 manifold에 대한 내용만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면, Lie structure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서 SU$($2$)$, 3+1 dimension, Lorentz group과 같은 여러 physics를 설명하는 수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반포기 정신 밖에 없었다. 

 현실 대신에 들어낸 바벨은 내 근육이 되어서 3대 450을 만들어 주었다. 몸무게도 이제는 87kg를 찍어 거의 키-몸무게가 90에 이르는 몸이 되었다. 남부럽지 않은 체격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봐보면, 인생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하루하루 행복함의 최고치가 뚫리고 있다. 내가 큰 가중치를 두고 살아가는 물리, 헬스 인생을 통틀어 지금 제일 잘한다. 그런데도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나고 있다. 취미로 하는 러닝, 일본어 같은 것들도 지금이 매일매일 신고점 갱신 중이다. 이제는 멘탈도 웬만한 거에는 안 흔들린다. 그냥 아예 독립적인 새로운 개체가 되었다. 나의 행복을 나 스스로 자연발생 시킬 수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있다. 

 도피하고 싶었던 연구실 생활이 이제는, 내 성장을 도모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에서 4년 더 공부를 해서 모든 방면으로 발전해 있을 내 모습이 기대가 된다. 아직 부족한 점들도 많지만,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